어려서 살던 집 화단엔
여러 가지 꽃과 나무가 많았다.
감나무, 은행나무, 향나무, 라일락,
앵두나무, 복숭아나무, 개나리, 오동나무…
채송화, 과꽃, 찔레꽃, 무궁화, 접시꽃,
백일홍, 국화, 코스모스, 제라늄, 맨드라미,
분꽃…
생각해 보니,
어머니는 겨울만 빼고는 늘
예쁜 꽃들을 보여주셨었구나!
꽃 중에는 한련화(旱蓮花)도 있었는데,
어린 나는
누나들이 말하는 이름을 듣고
그저 “활련”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도 오늘날까지.
* * * * * *
엊그제 일요일 모처럼
두하(斗河), 목선(穆詵), 회인(懷仁) 세 사람이
소위 ‘두목회(斗穆懷)’ 모임을 가졌다.
목선의 ‘나와바리’인 분당의 장어집에서.
1년여 전에 갑자기 상처(喪妻)를 하고
작년 겨울 이 자리에서 소주 한 병으로
붉어진 눈에서 눈물을 펑펑 쏟던 두하…
시간은 상처를 아물게하지만
무너진 마음이야 언제야 아물 것인가.
그러나 오늘은 두하도 빙긋이 웃으며
정지용 시인의 “향수(鄕愁)”를 외워 읊는다.
내가 고교때 ‘사이먼과 가펑클’의
“The Boxer“ 가사를 외우던 시절에
그는 “향수”를 외워
지금도 읊으라면 어디서나 줄줄 나온다고 한다.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정지용의 시(詩)에서는
“되는대로 쏜 화살을 찾으려” 였음을 알고
셋이서 작은 감동(?)마저 느꼈으니
시(詩)를 사랑하는 사람은
삶(生)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자신(自身)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 * * * * *
식사를 마치고 목선은
우리를 초가집 카페로 이끌었다.
진짜 옛 초가집의
나무 골조를 그대로 써서 꾸민
그 카페의 쌍화차 또한 별미였다.
넓은 창으로 후원(後園)이 보이는데
정갈한 화단에 한련화(旱蓮花)가
가득 피어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이 카페 주인의 가르침으로
꽃의 올바른 이름 한련화(旱蓮花)를
이제 다 늙어서야 제대로 알게 되었구나!!
아기 손바닥처럼 작은 이파리는
연잎을 꼭 닮았고
물이 아닌 마른 땅에서
자란다고 하여 지은 이름 한련화(旱蓮花)!
꽃에게 미안하구나,
이름도 잘못 알고 한 세상을 살아왔으니…
旱蓮花 한련화
懷仁 회인
草屋春光五色叢 초옥춘광오색총
妖姿裊裊受微風 요자요뇨수미풍
姮娥灑去仙衣粉 항아쇄거선의분
必是吾遊水鏡宮 필시오유수경궁
초가집에 봄빛 비치니 오색 무리 꽃송이들이
어여쁜 모습 산들 바람에 간들간들 흔들리네
항아 선녀 놀다가 뿌리고 간 날개옷 가루인가
이 몸이 필시 달의 궁전에서 노닐고 있구나
※ 叢무리 총, 裊裊요뇨…한들한들 흔들리는 모습,
姮娥항아…달에 산다는 선녀, 灑뿌린 쇄, 粉가루 분,
水鏡...달의 별칭.
나의 詩에 이어지는 목선(穆詵)의 시.
無廉恥 무염치
穆詵 목선
詩朋來訪不拘遐 시붕내방불구하
嘗味長魚冒狹斜 상미장어모협사
賓客出錢眞憫惘 빈객출전진민망
報酬代我旱蓮花 보수대아한련화
염치가 없구나
먼 길을 불구하고 시벗들이 오시어
꾸불꾸불 찾아가 장어를 맛보았는데
손님이 돈을 내니 내 민망한 마음을
한련화가 나 대신 고마움을 갚아주네
※ 狹斜협사…좁고 꾸불꾸불한 길
冒모…무릅쓰다, 무릅쓰고 나아가다
出錢출전….돈을 내다,
報酬보수…고마움을 갚다.
이에 이어지는 두하(斗河)의 시.
盆唐草屋 旱蓮花 분당초옥한련화
斗河 두하
三友徜徉栗洞湖 삼우상양율동호
喫茶草屋坐娛娛 끽다초옥좌오오
後園滿發春傳令 후원만발춘전령
洗眼明窓忘老臾 세안명창망노유
세 친구가 율동호수를 거닐다가
초가 찻집에 둘러앉아 즐거운데
뒤뜰에 봄의 전령이 활짝 피어나
눈밝아져 늙는 것을 잠시 잊었네
※ 徜徉상양...이리저리 돌아다님
娛娛오오...즐기는 모습, 臾잠깐 유.
일요일의 점심 때 몇 시간을
모여 놀고온 기분을 각자
한시 절구(絶句)로 지어 놓았으니
그 어떤 일기장보다도
품격있고 정겨운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이 행적을 내게 듣고서
잘 알고 있는 또 다른 친구
연준(燕俊)에게 알릴 겸 자랑도 할 겸
위의 한시(漢詩) 세 수(首)를 보냈더니
얼마 안가 그에 대한 연준의 답시가 왔다.
詩會 시회
韻士三朋解錦囊 운사삼붕해금낭
欣然酬唱擧杯觴 흔연수창거배상
風流日暮友情篤 풍류일모우정독
乘月暗浮詩句香 승월암부시구향
시인 세 벗이 모여 시 주머니를 풀어서
술잔 들고 시 주고 받으며 즐거워 할 새
풍류에 날 저물고 우정은 도타워지니
싯구의 향이 달빛 타고 은은히 퍼지네
※ 錦囊금낭...비단주머니, 시주머니, 당나라 시인 李賀가
시를 지어 비단주머니에 넣어 보관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篤도타울 독, 暗암...은근히, 은은히,
浮뜰 부(향기가 퍼짐을 의미).
이름도 없는 어느 일요일
아무도 알지 못하던 3인의 모임이
이렇게 재미있고 아름다운
한시 4수를 탄생시켰다.
자취도 없이 허공으로 날아갈 버렸을
그 따뜻하던 시간들이
영락없이 우리의 기억에 새겨졌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