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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살며 사랑하며

소나기

   이제 봄은 멀리 갔나 봅니다. 연일 낮 기온이 30도 가까이 오르니 며칠에
한 번씩은 이슬비라도 내려서 이 더위와 답답한 공기를 씻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름! 이제 우리 앞에 찾아 온 여름을 생각하면 저는 비가
먼저 떠오르는군요. 공기 청정기처럼 우리 곁을 깨끗하게 해주는 비. 때로는
집중 호우와 같은 사나운 얼굴로 변하는 심술을 부리기도 하는 우리의 친구....

  이 비라는 것을 땅껍질을 둘러싼 구름의 장난이라고 보면 좀 싱겁기도 하
지만, 땅에 발을 붙인 우리는 평소에 비와 하늘을 거의 같은 존재로 알며 살
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변화 없음을 싫어하는 우리에게 비가 있다는
것을 하나의 선물이라고도 여기고 싶구요. 매일이 모두 반짝 맑은 날 뿐이라
면 얼마나 무미할까요? 

  이슬비, 보슬비, 안개비, 는개, 장대비, 작달비, 가랑비, 소낙비, 여우비..
같은 비라도 분위기는 모두 다릅니다. 차분하게 계속 내리는 비도 좋지만, 때
론 멀쩡하다가 갑자기 주위가 부시럭 부시럭 좀 수상해지면서 어두워지고 이
어 뚝 뚝 후두둑 내리는 소나기의 분위기를 저는 참 좋아합니다.   

   <..서울 아이들은 소나기가 하늘에서 오는 줄 알겠지만 우리는 저만치 앞
벌에서 소나기가 군대처럼 쳐들어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가 노는 곳은
햇빛이 쨍쨍하건만 앞벌에 짙은 그림자가 짐과 동시에 소나기의 장막이 우리
를 향해 쳐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박 완서 님의 글에 나오는 소나기에 대한 묘사입니다. 지평선이 없는 대도
시의 아이들은 정말로 소나기가 하늘에서 오는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교외에
한 번이라도 나가서 소나기를 만난 사람들은 위의 글을 실감할 수 있을 것입
니다. 시골의 소나기야말로 정말 소나기답지요. 

  멀리서 눈에 보이게 이쪽으로 쳐들어오는 소나기가 무서워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집으로 냅다 뛰지만, 집에도 채 다다르기도 전에 그들을 덥친 소나기는
그 웃는 얼굴들 위로 굵은 물줄기를 마구 뿌립니다. 잠시 포기하고 젖어 주다
보면 이내 쨍쨍한 햇빛을 주고 사라지는 소나기!

                樹樹薰風葉欲齊 (수수훈풍엽욕제)
                正濃黑雨數峰西 (정농흑우수봉서)

               나뭇잎에 여울지며 더운 바람 지나더니
               검은 비 먼 산 밟고 주름주름 건너온다

          한 줄기 수상한 더운 바람이 불어와 나뭇잎들은 쏴아 여울물 소리를 내고,
무언가 느낌이 이제까지와는 달라 먼 산을 보면, 스물거리던 구름장들이 검게
어우러지며 멀리서부터 마치 천군(天軍)이 쳐들어오듯 어두운 비가 봉우리들
을 건너오는 모습... 

  추사 김 정희(金 正喜)의 취우(驟雨, 소나기)라는 시에 나타난 소나기의 모
습입니다. 여기에서도 역시 갑작스럽게 멀리서부터 쳐들어오듯 다가오는 소나
기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살아가는 일도 이런 갑작스러운 일의 연속이 아닌가 합니다. 예기치 못했던
일들이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갑자기 와서는 일상에 주름을 만들어 놓고 가는
일이 허다하지요. 우리네 삶도 이런 면에서는 소나기 앞의 어린이와 닮은 점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갑작스러운 속성에도 불구하고 한 차례 내리고는 스스로 어두운
기운을 걷고 사라지는 소나기... 그 뒤엔 항상 맑고 빛나는 명징(明澄)함이 따
라온다는 믿음이 있기에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소나기의 습격을, 삶에서의 어떤
무서움을 대신 해소(解消)할 수 있는 대상으로 즐기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
다. 무서운 것이 오기 전의 아릿아릿한 공포를...

  이제 소나기가 흔한 계절이 다가옵니다. 유난히도 비를 좋아하는 저는 올 여
름도 자주 찾아올 먹구름과 소나기를 즐겨 맞이하며 더운 계절을 건너가 볼까
생각 중입니다. (200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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