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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漢詩)의 맛과 멋

거제도 (巨濟島) 몇 년만에 다시 와보는 곳인가 숙소의 넓은 창(窓)으로, 선친(先親)이 어린 시절을 보낸 옛 고산(故山)과 그 아래 마을이 아스라이 보이고. 그 앞바다의 작은 등대도 보인다. 거의 100년 전 내가 닮은(?) 예닐곱 살 아이(죄송)가 저 마을에서 뛰어놀던 장면 속으로 생각은 빛의 속도로 달려간다. 그리운 그 얼굴이여 생(生)의 유한(有限)함이여, 덧없음이여... 거제(巨濟) 고현시장 앞의 식당에 들어가 멸치쌈밥과 회무침을 시켰는데, 여사장님의 주머니에서 내 핸드폰 소리가 울리기에 밥을 먹다가 깜짝 놀랐다. 여사장님의 벨소리가 나의 벨소리와 같은 차이코프스키의 ‘소중한 날의 추억’이었던 것이다. 이도 흔치 않은 일인데 더구나 세례명이 ‘마르티나’인 카톨릭 신자라 하시니 더욱 반가워서 다음날도 그 식당에 다.. 더보기
모춘 (暮春) 어제 아침 일어나 창문을 여니 물행주로 한 번 말끔히 씻은 듯 길과 나무가 촉촉하고 먼 산과 하늘이 산뜻하게 다가온다. 아, 이 맑은 공기 마음놓고 심호흡을 해보는 이 소박한 기쁨! 그러고보니 간밤 잠결에 또옥 또옥.. 창밖에 떨어지던 빗소리를 들었던 생각이 난다. 세상은 어지럽게 돌아가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 집 뒤의 양재천에 나갔더니 장난꾸러기 봄바람이 날 보고는 홱 돌아서 달려가며 물 위에 주름을 잡아놓고는 헤헷 웃고 서 있고 구름은 연신 흘러가며 물 위에 그림을 그리고 지우고 또 그린다. 목련, 산수유, 개나리, 벚꽃, 모란, 라일락도 이제 다 떨어지고 봄바람 저 친구도 이제 가면 내가 또 한 해 건강하게 지내야 다시 만날 수 있겠구나. 풀냄새를 맡으며 집에 돌아와 앉으니 창밖에서 까악까악 소리.. 더보기
상신(傷神) 임기가 다 되어 물러나는 사람들이 자기들을 수사하려는 검찰의 수사권을 박탈하는 법을 만들었다. 임기가 며칠 안 남았기에 서둘러 추진하다보니 이런저런 미비점이 드러나 과연 목적을 달성하려는지.. 우리나라 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이런 경우가 있었는가 아무리 돌이켜봐도 기억나는 것은 없다. 잘못한 것이 없다면 누가 아무리 자신을 수사하려 해도 무서울 것이 없이 떳떳할 텐데.. 자기들은 청문회 통과 없이 수십 명을 그냥 임명해 놓고 입장이 바뀌니 어디 한 번 따져보자고 새 정부의 일을 맡기려는 후보자들에 대해 사정없이 해대겠다고 벼르고 있다. 자기 딸의 스펙을 위조해서 입학시험 한 번 치르지 않고 딸을 의사로 만들었던 이는 무슨 좋은 기회나 만난 듯 되지도 않을 소리로 sns를 도배하고 있으니 부끄러움도 모르는 .. 더보기
칠보시 (七步詩) 금년 50세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미국인 일런 머스크는 전기차 제조업체인 테슬라(Teslar)의 CEO이자, 화성(Mars)의로의 이주 개발을 위한 회사인 ‘스페이스 X’를 운영하면서, 한편으로는 장거리 급속 이동수단인 하이퍼큐브도 개발하고 있는 유명 기업 인이다. 중공(中共)에도 전기차(電氣車)인 테슬라를 팔고 있는 그가 며칠 전 트윗터에 조식(曹植)의 칠보시(七步詩)를 올려 놓았다. 煮豆燃豆萁 자두연두기 콩을 삶는데 콩줄기를 태워 삶으니 豆在釜中泣 두재부중읍 콩은 솥 안에서 뜨거워 울고 있구나 本是同根生 본시동근생 본래 한 뿌리에서 생겨나 자랐건만 相煎何太急 상전하태급 왜 이다지도 급하게 삶아대는가 이 시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알려져 있다. 지금부터 약 2000년 전에 조조(曹操)의 아들 조비.. 더보기
수창(酬唱) 如此亦何如 여차역하여 이런들 어떠하며 如彼亦何如 여피역하여 저런들 어떠하고 城隍堂後垣 성황당후원 성황당 뒷담이 頹落亦何如 퇴락역하여 퇴락한들 어떠하리 我輩若此爲 아배약차위 우리들도 이처럼 不死亦何如 불사역하여 죽지않고 살면 어떠하리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고려 충신 정몽주를 끌어들이려고 넌지시 그 앞에서 지어 읊은 하여가(何如歌)이다. 물론 당시에는 우리말로 읊었겠지만, 후세의 한 역시(漢譯詩)는 위와 같이 전한다.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다는 쉬운 표현이지만,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면죽음을 면치 못하리라는 칼날 같은 암시가 뒤에 나타나 있으니, 노래치고는 매우 무서운 노래이다. 이에 대한 정몽주의 답가(答歌)는 此身死了死了 차신사료사료 이 몸이 죽고 죽어 一百番更死了 일백번갱사료 일백번 고쳐 죽어 白骨爲塵土.. 더보기
가을날 가을이 되면 무성했던 나무들도 잎을 떨구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 오니 마음도 따라 슬쓸해진다고들 말한다. 모든 것이 얼어붙을 겨울을 생각하면 더욱더 움츠러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마음 속에 늘 고상한 기운을 간직한 사람들은 가을에 쓸쓸해할 틈이 없다. 외롭지만 고고(孤高)한 한 마리 학(鶴)처럼 시인의 마음은 맑고 정갈한 시정(詩情)을 펼치기에 맞는 계절이 가을이다. 秋詞 추사 自古逢秋悲寂寥 자고봉추비적요 我言秋日勝春朝 아언추일승춘조 晴空一鶴排雲上 청공일학배운상 便引詩情到碧霄 편인시정도벽소 가을에 예부터 사람들 가을이면 쓸쓸해하는데 나는 가을의 햇볕이 봄날보다 좋다네. 해맑은 하늘에서 학 한 마리 구름 제치고 마음의 시정 끌고 푸른 하늘로 날아오른다. 당(唐) 시인 유우석(劉禹錫, 772-842)의 작품 ‘.. 더보기
도불원인(道不遠人) 흔히 4서 3경(四書三經)이라 불리는 책 중에서 의 13장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子曰 道不遠人 人之爲道而遠人 不可以爲道. 자왈 도불원인 인지위도이원인 불가이위도 (공자 왈, 道는 사람과 멀리 있지 않으니 道를 행한다고 하면서 사람을 멀리하는 것은 진정한 道를 행함이 아니니라) 여기서 ‘道’는 도리(道理) 또는 진리(眞理)쯤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조선 선조(宣祖)때 백호(白湖) 임 제(林 悌)라는 분이 있었다. 스승인 성 운(成 運)이 속리산에 은거하자 그 밑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이때 그는 을 800번이나 외웠다고 한다. 이후 과거에 급제 했으나 당쟁(黨爭)에 휘말리기 싫어 방랑생활을 하다가 길지 않은 생을 마쳤다. 그가 속리산에 있을 때 위의 13장에 나오는 구절을 속리산(俗離山)과 엮어.. 더보기
죽설헌 (竹雪軒) 나주(羅州)에서 태어난 소년은 나무를 심으면서 살아가기로 뜻을 세웠다고 한다. 숲이 좋아서 남들은 열심히 가꾸어 적잖은 수입을 올리는 배나무들을 하나씩 둘씩 베어내고 그 자리에 숲을 이룰 나무를 심어나갔다. 성인이 되어 향리에서 직장을 얻은 후로는 일을 끝내고 퇴근하여 밤마다 그림을 그리고 그림 공부를 하였다. 세월은 흘러 흘러 그의 터전은 아름다운 숲이 되었고 그는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시원(枾園) 박태후(朴太候) 화백(畵伯). 그가 이룬 숲속에 있던 생가를 헐고 아내와 둘이서 새 집을 지어 죽설헌(竹雪軒)이라고 이름하였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야생화들을 군락으로 심어서 아름다운 토종(土種) 원림(園林)을 이루었다. 부부 둘이서만 이 원림을 가꾸어 나가자니 사계절 한시라도 일이 없는 날이 없어 두 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