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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漢詩)의 맛과 멋

차군 (此君) 오늘 아침 조선일보를 보니 버지니아에 사는 게일 허(85세) 여사가 소치(小癡) 허 련(許 鍊)의 자손인 시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아 보관해오던 조선 회화 13점을 한국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신문에 실린 사진은 송도대련(松圖對聨). 한 그루의 노송을 각각 그린 두 장의 소나무 그림에는 만당(晩唐)의 이산보라는 시인의 시구가 쓰여 있다. 平生相愛應相識 평생상애응상식 誰道脩篁勝此君 수도수황승차군 “내 평생 소나무를 사랑하여 왔으니 누가 대나무가 이 분(소나무)보다 낫다고 했는가“ 시인은 소나무를 한갓 나무로 보지 않고 이 분(=此君, 차군)이라고 쓰고 있다. 그런데 이 ‘차군’이라는 말은 원래 4 세기 동진(東晉)의 서예가 왕휘지(王徽之)가 대나무를 사랑하여 何可一日無此君耶 하루라도 이 분이 없이 어찌지내랴, 라.. 더보기
산사 (山寺) 친구 L은 홀로 여행을 좋아하였다. 대학시절 방학을 하면 어느 샌지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얼마 후 설악산 산사(山寺)에서 상큼한 공기가 묻은 것 같은 엽서가 날아들곤 했다. 아하 이 친구 또 소식도 없이 산사에 숨었구나. 투우장(鬪牛場)에는 소들이 대기하는 곳, 즉 케렌시아(Querencia)가 있다고 한다. 싸우러 나갈 소들이 쉬고 있거나 힘써 싸워 지친 소들이 쉬며 힘을 얻는 곳, 돌이켜보면 그는 쓸쓸하지만 혼자만의 케렌시아에 숨어 가지고 있는 고민거리(?)에 대해 이리저리 결론을 얻으려 사고(思考)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그에 비해 철없던 나는 혼자 여행하는 것을 싫어하여 어딜 가나 친구들과 어울려 가는 것을 좋아했었고 나이든 지금까지도 왜일까 나는 일부러 홀로 여행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 더보기
맹춘 (孟春) 꽃과 나무를 가꾸며 사랑하는 고교 동창들 모임방에 오늘 아침 제주도의 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이 사진과 함께 올라왔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정원의 흰 매화가 이제 막 벙글고 있네. 길었던 겨울의 칩거(蟄居)끝에 내 마음 속에도 무언가 희망 같은 것이 피어나는 듯한 느낌. 이런 것들이 예전과는 비할 수 없이 빨리 눈에 들어 오니 나도 나이를 먹었다는 이야기인가. 중,고, 대학까지 동창인 J박사는 어느새 제주에 둥지를 틀었는지 정원 가득, 실내에는 물론 집 옥상에까지 꽃과 나무가 가득하다. 수선화는 활짝 피어 살짝 수그린 꽃송이가 셀 수도 없이 그의 정원 곳곳을 장식하고 있고. 은행나무, 인동초, 서어나무도 봄맞이 가지치기를 했다 하고 특히 늘 그는 어린 소나무를 장독에 심고서 수형(樹形)잡기를 하느라 이 봄.. 더보기
한련화 (旱蓮花) 어려서 살던 집 화단엔 여러 가지 꽃과 나무가 많았다. 감나무, 은행나무, 향나무, 라일락, 앵두나무, 복숭아나무, 개나리, 오동나무… 채송화, 과꽃, 찔레꽃, 무궁화, 접시꽃, 백일홍, 국화, 코스모스, 제라늄, 맨드라미, 분꽃… 생각해 보니, 어머니는 겨울만 빼고는 늘 예쁜 꽃들을 보여주셨었구나! 꽃 중에는 한련화(旱蓮花)도 있었는데, 어린 나는 누나들이 말하는 이름을 듣고 그저 “활련”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도 오늘날까지. * * * * * * 엊그제 일요일 모처럼 두하(斗河), 목선(穆詵), 회인(懷仁) 세 사람이 소위 ‘두목회(斗穆懷)’ 모임을 가졌다. 목선의 ‘나와바리’인 분당의 장어집에서. 1년여 전에 갑자기 상처(喪妻)를 하고 작년 겨울 이 자리에서 소주 한 병으로 붉어진 눈에서 눈물.. 더보기
모자 (帽子) 입춘 우수도 지나고 날씨도 많이 풀린 것 같아 겨우내 쓰고 다니던 모자를 벗어서 벽에 걸어놓았다. 어지간히도 추웠던 이번 겨울 내 머리를 보호해 주던 고마운 저 모자. 십여년 전 북해도 여행시 삿포로 공항 면세점에서 산 것으로 버버리 문양 천으로 만들고 앞으로 짧은 창이 달린 모자. 저 모자를 쓰고 강화도 어느 박물관에 갔을 때 주인이 나를 유명한 영화 감독 L씨로 알고 인사하러 찾아올라 왔던 일도 기억이 난다. 아침에 모자를 찾아도 없어서 그냥 출근했더니 병원 옷장에 숨어 있던 모자. 다른 날 또 그런 일이 있어서 아하 병원 옷장에 또 두고 그냥 나왔구나 하며 출근해 열어보니 모자가 없어서 앗, 잃어버렸구나 하고 아쉬워했으나 저녁때 헬스장에 갔더니 탈의실장이 보관하다가 내어준 저 모자, 그 뿐인가, 비.. 더보기
설야 (雪夜) 겨울이 한창이다. 쇼팽의 보다 더 센 바람이 쌩쌩 불어오면 자연히 몸이 움츠러 들고 따뜻한 방(房) 안이 그리워지며 눈 덮힌 사직공원에서 아내와 둘이서 두어 시간을 노닥거리던 먼 옛날 연애시절이 생각난다. 그 야릿야릿하던 아내가 지금까지도 옆에 있어주는 게 고마워 저녁 식탁에 둘이 앉아 고기 몇 점에 와인 서너잔을 마시니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듯 기운이 솟고 흥(興)이 솟는다. 마침 창밖엔 눈이 하얗게 내려 있는 밤 밖에 나가 시린 손 마주 잡고 뽀드득 뽀뜨득 일부러 눈 쌓인 곳을 걸으며 꿈속인 듯 옛날로 다시 돌아가 본다. 雪夜 설야 乙夜耽吟子美詩 을야탐음자미시 吹風枯葉打窓時 풍취고엽타창시 把燈遣興推門出 파등견흥퇴문출 滿地鋪銀忽夢疑 만지포은홀몽의 늦은 밤 두보선생 시를 즐겨 읊는데 바람 불어 마른 잎.. 더보기
백로 (白鷺) 요즘 우리나라의 환경도 많이 깨끗해졌는지 집 근처의 하천이나 시골의 논과 강에서도 쉽게 백로(白鷺)를 볼 수가 있다. 백로는 한시(漢詩)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새중의 하나이다. 커서 눈에도 잘 띨 뿐 아니라 희고 단아한 모습이 마치 지조가 있는 고고한 선비를 연상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물가에 점잖게 미동도 없이 서 있는 백로를 고려의 문호 이규보(李奎報)는 心猶在灘魚 심유재탄어 人道忘機立 인도망기립 마음은 물속의 고기에만 가 있는데 우리가 아무 욕심없이 서 있다고들 말하네 라고 詩를 써서 고고한 자태로 보이지만 실은 물고기를 먹으려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고 하여 욕심을 감추고 고고한 척하는 인사들을 비꼬았다. 백로는 늦은 봄에 우리나라에 와서 여름을 지내며 번식을 하고 가을엔 따뜻한 남쪽 나라로.. 더보기
입동 (立冬) 아직도 가을인데 절기로는 오늘이 입동(立冬)이다. 또 한 해의 마지막 계절을 맞으려니 어쩔 수 없이 마음에 서리는 감회(感懷)! 남은 날들을 자꾸 헤아려 보게 되니 궁상(窮狀)스러운 것 같아 부끄러워진다. 無邊木落蕭蕭下 라… “어딜 봐도 가없이 낙엽만 쓸쓸히 떨어지는 풍경“을 보고 두보(杜甫)의 그 시(詩) 가 생각난다. 두보의 율시(律詩) 의 마지막 연(尾聯)은 이렇다. 艱難苦寒繁霜鬢 간난고한번상빈 潦倒新停濁酒杯 요도신정탁주배 * 艱難간난…힘들고 고생스러움, 苦寒고한…추위로 겪는 괴로움 繁많을 번, 霜鬢상빈…서리내린 살쩍, 흰 머리. 潦倒요도…노쇠한 모양. 停멈출 정 "온갖 고초 심한 추위에 흰머리만 늘어나고 늘그막 탁주 따라 마시려다 잠깐 잔을 멈춘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에 있는 멈출 정(停)자를 .. 더보기